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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아카이브] 스페인 계단과 콜로세움 — 브랜드가 유산을 '돈으로 사는' 방법

이안 박(Ian Park)의 브랜드 서재 2026. 8. 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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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아카이브] 스페인 계단과 콜로세움 — 브랜드가 유산을 '돈으로 사는' 방법

 

기부인가, 투자인가 — 명품 하우스들이 로마의 돌을 닦는 진짜 이유


2014년 봄, 로마 시청에서 공식 발표가 있었습니다. BVLGARI가 스페인 계단(Scalinata di Trinità dei Monti) 전면 복원에 150만 유로를 기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로마 시장은 이 기금을 "로마 시민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불가리 측은 1884년 창립 1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라고 설명했습니다. 둘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로마의 휴일, 그 완벽한 배경이 되다

 

스페인 계단 바로 아래, 비아 콘도티 10번지에 불가리 플래그십 스토어가 있습니다. 1905년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복원이 완료된 계단은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오르내리는 로마 최대의 인증샷 명소가 됐습니다. 그 계단 아래 상점의 쇼윈도는 언제나 그 배경 속에 놓입니다.

 

이것이 우연인가, 설계인가. 이 질문이 오늘의 출발점입니다.


세 개의 기부, 세 개의 계산법

2010년대 중반, 로마는 재정난에 시달렸습니다. 수천 년의 유산을 관리할 예산이 부족했고, 공공 유적들은 균열이 가고 빛이 바래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를 럭셔리 브랜드들이 채웠습니다. 시기가 겹친 세 개의 복원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BVLGARI의 스페인 계단입니다. 2014년 기부 발표, 2015년 복원 착수, 2016년 9월 재개방까지 약 2년간 진행됐습니다. 기부액 150만 유로. 복원 후 계단은 이전보다 훨씬 밝고 깨끗해졌습니다. 불가리는 창립 130주년 기념 헤리티지 행사를 복원 완공과 맞물려 진행했고, 복원된 계단 앞에서 공식 촬영과 브랜드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전 세계 언론이 "불가리가 복원한 스페인 계단"을 보도했습니다. 홍보 효과의 환산 가치는 기부금을 가볍게 넘습니다.

 

두 번째는 Fendi의 트레비 분수입니다. 2013년경 후원 발표, 약 17개월의 복원 공사, 2015년 11월 재개장. 투자액 약 220만 유로. 그리고 2016년 7월, 펜디는 창립 90주년을 기념하는 오트 쿠튀르 패션쇼를 복원된 트레비 분수 안에서 열었습니다. 물을 빼고 투명 런웨이를 깔았습니다. 켄달 제너와 벨라 하디드가 분수 바닥을 걸었고, 칼 라거펠트가 연출했습니다. 행사 이름은 'Legends & Fairy Tales'. 전 세계 패션 미디어가 이 장면을 다음 날 일제히 커버했습니다. 복원 비용은 이 하룻밤의 무대 사용료로 회수됐을 것입니다 — 적어도 인지도 측면에서는.

물 위를 걷는 모델들, 분수 위 런웨이의 마법

 

Fendi 투자: 약 220만 유로 → 트레비 분수 단독 런웨이 → 전 세계 동시 보도

세 번째는 규모가 다릅니다. Tod's의 콜로세움입니다. 2011년, 토즈 그룹의 창업자 디에고 델라 발레(Diego Della Valle)가 콜로세움 복원에 2,500만 유로를 서약했습니다. 콜로세움의 수십 년간 방치된 균열과 오염을 전면 복원하는 장기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금액은 당시 이탈리아 문화유산 단일 프로젝트 기준으로도 역대 최대 규모의 민간 기부 중 하나로 꼽힙니다. 복원은 외벽과 내부 구조를 거쳐, 검투사와 동물들이 대기하던 지하 통로(hypogea) 복원까지 포함하며 2010년대 중후반까지 단계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세 브랜드, 세 가지 계산법 — 한눈에 보기

BVLGARI Fendi Tod's

대상 유적 스페인 계단 트레비 분수 콜로세움
기부·서약 2014년 2013년경 2011년
금액 약 150만 유로 약 220만 유로 2,500만 유로
완공 2016년 9월 2015년 11월 2010년대 중후반
기념 계기 창립 130주년 창립 90주년 특정 주년 없음, 순수 후원
회수 방식 브랜드 캠페인·화보 패션쇼 단독 대관 브랜드명이 아닌 '국가 유산 스폰서' 지위
규모의 성격 상점 앞 무대 만들기 이벤트형 자산화 국가급 상징 자본 축적

 

이 표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입니다. 세 브랜드 모두 '헤리티지 서사'를 얻었지만, 그 서사를 회수하는 방식은 각자 달랐습니다. 불가리는 매장의 배경을, 펜디는 하룻밤의 무대를, 토즈는 국가 단위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명명권 없는 후원 — 그러나 이름은 새겨진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기부에 **명명권(naming rights)**은 없었습니다. 스페인 계단은 여전히 스페인 계단이고, 트레비 분수는 여전히 트레비 분수이며, 콜로세움은 콜로세움입니다. 브랜드 이름이 유적 이름으로 대체되지 않았습니다. 미국 스포츠 경기장들처럼 기업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름 없이도 이름이 새겨집니다. 스포츠 경기장 명명권과 문화유산 후원의 결정적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경기장은 이름을 붙이는 순간 계약이 끝날 때 지워지지만, 유적 복원은 **"누가 이것을 살려냈는가"**라는 서사로 기억됩니다. BVLGARI가 스페인 계단을 복원했다는 사실은 계약서에 적힌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졌습니다. '폰타나 디 펜디(Fontana di Fendi)'라는 별명이 반농담처럼 돌았지만, 그 농담 속에 이미 브랜드 이름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광고는 사라져도 복원은 남는다 — 헤리티지의 두께

 

학술 저널 CLARA(Culture, Language, and Representation)에 실린 논문 "Fashion Benefaction: Luxury and Brand Heritage in the Eternal City"는 이 현상을 정확히 포착합니다. 이 논문은 특히 토즈의 콜로세움 사례를 중심으로, 럭셔리 브랜드들이 로마의 유산을 후원하는 것이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브랜드 자신의 헤리티지 내러티브에 유적의 역사적 권위를 접붙이는(grafting) 행위라고 분석합니다. 로마의 3,000년이 브랜드의 140년 위로 겹쳐 올라옵니다.


전략의 구조 — 왜 하필 로마인가

이 질문이 흥미롭습니다. 왜 파리나 런던이 아닌 로마인가.

왜 로마인가? — 문명의 서사와 접붙이다

파리에도 유적이 있고, 런던에도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명품 하우스들이 문화유산 후원 프로젝트를 집중시킨 도시는 단연 로마입니다. 이유는 구조적입니다. 로마는 서구 문명의 원형 서사가 집중된 도시입니다. 콜로세움은 '제국'을 상징하고, 트레비 분수는 '풍요와 귀환'을 상징하며, 스페인 계단은 '낭만과 우아함'을 상징합니다. 이 상징들과 브랜드 이름이 함께 발화될 때, 브랜드는 단순한 상품 제조사가 아니라 문명의 수호자 포지션을 획득합니다.

 

BVLGARI는 이미 그 이점을 가장 영리하게 활용해온 브랜드입니다. 불가리 편에서 살펴봤듯, 창업자 소티리오 불가리는 그리스 이민자였습니다. 그 이방인이 비아 콘도티에 자리를 잡고, 라틴 알파벳으로 로고를 새기고, 로마의 유산에 기부를 이어가는 과정은 브랜드 정체성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긴 서사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로마의 일부다."

 

펜디도 마찬가지입니다. 펜디는 로마에서 1925년 창립한 브랜드입니다. 트레비 분수 후원은 "로마 출신 브랜드가 로마를 돌본다"는 서사를 완성합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패션쇼를 열었을 때, 브랜드와 도시의 경계가 의도적으로 흐려졌습니다.


비판의 언어 — '컬처 워싱'인가

물론 이 모든 것이 순수한 찬사만 받은 것은 아닙니다. 비판도 존재합니다.

패션쇼 논란, 공공 공간의 사유화인가 헌정인가

가장 강력한 비판은 공공 자산의 브랜드화에 관한 것입니다. 예산이 없는 공공 기관이 사유 기업의 후원에 의존해 유산을 유지하게 될 때, 유적의 관리 방향이 시민의 공공 의사결정이 아닌 후원자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펜디의 트레비 분수 패션쇼는 이 비판을 구체적으로 불러일으켰습니다. "분수를 살려줬다"는 명분으로 단 하룻밤, 공공 공간이 사유 행사장으로 전환됐습니다. 입장은 초청된 이들에게만 허용됐습니다.

 

환경·윤리 기준과 연결 짓는 분석도 있습니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문화유산을 후원하면서 '책임 있는 기업'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동시에, 공급망의 노동 문제나 환경 영향 등 다른 면에서는 비판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에 '컬처 워싱(culture washing)' — 문화적 기여로 다른 이슈를 가리는 전략 — 이라는 프레임을 조심스럽게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확립된 공식 용어라기보다는, 그린워싱·아트워싱에 준하는 신생 개념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반론도 있습니다. 만약 이 브랜드들이 기부를 하지 않았다면, 스페인 계단과 트레비 분수와 콜로세움은 지금보다 훨씬 더 손상된 상태였을 것입니다. 공공 예산은 없었고, 유적은 스스로를 고칠 수 없습니다. 동기가 순수하지 않더라도 결과가 남는다 — 이것이 이 전략의 가장 강력한 방어선입니다.


콜로세움이 다른 이유 — 규모가 만드는 성격의 차이

역대급 규모의 기부, 토즈의 콜로세움 복원 서약

여기서 토즈의 사례를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페인 계단과 트레비 분수는 상대적으로 소규모 관광 명소이고, 복원 기부액도 각각 150만 유로, 220만 유로 규모였습니다. 반면 토즈가 서약한 2,500만 유로는 이 두 금액을 합친 것보다도 몇 배 큽니다.

 

이 차이는 회수 전략의 성격도 바꿔놓습니다. 불가리와 펜디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서사를 회수했습니다. 브랜드 캠페인, 화보, 하룻밤의 패션쇼. 반면 토즈는 특정 창립 주년을 기념하지도 않았고, 콜로세움 안에서 패션쇼를 열지도 않았습니다. 콜로세움이라는 유적 자체가 세계적으로 워낙 압도적인 상징이라, 굳이 브랜드 이벤트로 그 위에 다시 덧칠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신 토즈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국가 유산의 최대 민간 후원자"라는, 더 느리지만 더 무거운 지위를 얻었습니다. 규모가 클수록 브랜드는 오히려 눈에 덜 띄는 방식으로 서사를 축적하는 셈입니다.


헤리티지 투자의 공식

이 세 가지 사례를 브랜드 전략의 언어로 정리하면 하나의 공식이 나옵니다.

 

기부금 + 유산의 서사 = 브랜드 헤리티지의 두께

 

이것은 광고가 아닙니다. 광고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복원은 물리적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복원된 유적 앞에 서는 사람마다 — 의식하든 하지 않든 — 그 유적을 살려낸 이름을 어느 순간 한 번쯤은 듣게 됩니다. 이것이 광고 예산으로 살 수 없는 종류의 브랜딩입니다.

 

BVLGARI 편에서 정리했던 비교를 기억하실 겁니다. 카르티에는 지위의 언어, 티파니는 감각의 언어, 불가리는 시간의 언어라고 정리했습니다. 시간의 언어를 말하는 브랜드가 문화유산 복원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시간의 언어는 시간이 실제로 쌓인 것들 곁에 있을 때 가장 설득력 있게 발화됩니다.

 

스페인 계단의 돌은 250년 됐습니다. 그 옆의 불가리 스토어는 120년 됐습니다. 그 계단이 닦이는 순간, 두 나이가 합쳐집니다. 이것이 브랜드가 유산을 '돈으로 사는' 방식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는, 유산과 같은 시간 위에 서는 방식입니다.


브랜드 서재 by 이안 박 | brand-archive.com "복원은 광고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사람은 결국 이름을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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