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아카이브] 모리스 창(張忠謀) — 56세에 산업 질서를 다시 쓴 사람
[브랜드 아카이브] 모리스 창(張忠謀) — 56세에 산업 질서를 다시 쓴 사람
안녕하세요, 이안 박입니다.
오늘은 브랜드 아카이브의 서랍 하나를 열어봅니다.
브랜드 아카이브를 쓰다 보면, 가끔 인물 자체가 브랜드인 경우를 만납니다. 코코 샤넬이 샤넬 자체였고, 소티리오 불가리가 BVLGARI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인물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브랜드로 앞세우지 않았지만, 하나의 산업 구조 자체를 새로 설계했습니다.
그 이름은 모리스 창(Morris Chang, 張忠謀). TSMC의 창업자입니다.

그리고 1987년, 그는 56세에 TSMC를 세웠습니다.
1장 — 1931년 닝보, 전쟁이 기른 아이
모리스 창의 원래 이름은 **장중머우(張忠謀)**입니다. 1931년 7월 10일, 중국 저장성 닝보(寧波)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현(縣) 정부의 재무 관리로 일하던 중산층 관료였습니다.
어린 모리스 창은 원래 소설가나 저널리스트를 꿈꿨습니다. 책을 좋아했고, 글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년기는 전쟁이 함께 흘렀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가족은 닝보에서 광저우로, 광저우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충칭으로 피난을 거듭했습니다. 1941년 일본이 홍콩을 점령하자 다시 중국 대륙으로. 1948년 국공내전(國共內戰)이 치열해지자 또다시 홍콩으로. 청소년기에 여러 도시를 옮겨 다녔습니다.

이 유랑이 그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하는 능력. 새로운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세. 나중에 그가 보여줄 "아무도 해본 적 없는 것을 조용히 설계하는" 기질이 이 시절에 새겨졌을 것입니다.
2장 — 하버드, 그리고 1달러의 선택
1948년, 아버지는 홍콩에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작가로는 먹고 살기 어렵다. 공학을 공부해라." 홍콩에는 제대로 된 이공계 대학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결정: 미국 유학.
1949년, 18세의 장중머우는 하버드에 입학했습니다. 그해 중국 본토에서는 공산당이 최종 승리를 굳히고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하버드에서 MIT로 옮겨 기계공학을 공부했습니다. 박사 과정 진학을 시도했지만 MIT의 박사 자격시험에서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취업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1955년, 그에게 두 군데에서 취업 제안이 왔습니다. 하나는 포드 자동차, 다른 하나는 실바니아(Sylvania) — 당시 이름도 낯선 작은 반도체 회사였습니다. 그가 결국 실바니아를 선택하게 된 유명한 일화가 자서전에 전해집니다. 실바니아의 제안이 월 급여에서 1달러 더 높았는데, 그가 포드에 동일 조건으로 맞춰달라고 요청했을 때 포드 담당자가 무례하게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분개한 장중머우는 실바니아를 택했습니다.
역사는 종종 이런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작은 계기 하나가, 반도체 산업의 판도를 바꾸는 연쇄의 첫 단추였습니다.
3장 —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그리고 "학습 곡선"이라는 무기
1958년, 장중머우는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에 입사했습니다. 그의 나이 27세였습니다.
TI는 달랐습니다. 임원 전용 주차장이 없었습니다. 경영진과 생산직이 같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모두가 반도체를 알았고, 모두가 필사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TI에 매혹됐습니다.

이후 20년 넘는 세월 동안, 그는 TI에서 빠르게 올라갔습니다. 게르마늄 트랜지스터 연구부장, 실리콘 트랜지스터 부서장, 집적회로 부서장을 거쳐 1972년에는 TI 전체 반도체 사업부문 책임자에 올랐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반도체 산업의 핵심 원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학습 곡선(Learning Curve)"의 위력.
생산량이 두 배 늘어날 때마다 생산 비용이 일정 비율로 떨어진다는 원리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습니다. 지금 당장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가격을 낮춰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확보하면, 나중에 압도적인 비용 우위를 갖게 된다. 그는 이것을 **"비용 곡선 앞에서 가격을 앞세운다(pricing ahead of the cost curve)"**라는 개념으로 TI에서 실행했습니다. 훗날 TSMC를 키우는 데도 이 논리가 핵심 전략이 됩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TI의 경영진은 방향을 틀었습니다. 반도체보다 계산기, 전자시계, 가정용 컴퓨터로 눈을 돌렸습니다. 장중머우는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직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반도체 중심 전략에서 멀어지는 회사 안에서 그의 설 자리도 점점 좁아졌습니다.
1983년, 그는 TI를 떠났습니다. 52세였습니다.
4장 — 실패가 왜 자산이 되었나: 두 번의 좌절, 그리고 뜻밖의 귀환
TI를 떠난 후 그는 **제너럴 인스트루먼트(General Instrument)**의 사장 겸 COO로 취임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도 짧은 재임 후 회사를 떠나게 됩니다. CEO와 비전이 달랐습니다. 그는 사업을 키우려 했고, CEO는 기업을 사고파는 사모펀드식 접근을 원했습니다.

연속된 좌절이었습니다. MIT 박사과정의 벽, TI에서의 밀려남, General Instrument에서의 짧은 재임.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혹시 내가 '피터의 원리'에 따라 내 능력의 한계까지 올라온 것은 아닐까 스스로 물었다." (피터의 원리: 사람은 자신이 무능해지는 지점까지 승진한다는 이론)
바로 그때, 대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만 행정원 원장 쑨원쉔(孫運璿)은 1970년대부터 모리스 창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대만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려면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필요했습니다.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에서 나온 직후 그에게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대만 산업기술연구원(ITRI) 원장으로 와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모리스 창은 수락했습니다. 1985년, 1931년 닝보에서 태어나 1949년에 떠난 이 남자가, 처음으로 중화권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이 이야기의 핵심을 다시 짚어야 합니다. 이 서사는 단순히 "좌절 뒤의 성공"이 아닙니다. 오랜 경험이 새로운 산업 모델로 결합된 과정입니다. 실패처럼 보였던 20여 년이 실은 지식의 축적이었습니다.
5장 — TI에서 배운 것이 결합되는 순간
1985년, 모리스 창이 ITRI 원장으로 부임한 다음 날, 그는 전임자의 업무 인수인계 목록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항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 개의 집적회로 회사에서 각자 반도체 팹(Fab) 건설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있음. 처리 요망."
ITRI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세 개의 팹을 각각 짓는 데 드는 돈은 막대했습니다. 거절하자니 반도체 산업 육성이라는 ITRI의 존재 목적에 어긋났고, 승인하자니 돈이 없었습니다.
그 메모를 읽으면서 모리스 창의 머릿속에 그간의 기억이 교차했습니다.
TI 재직 시절, 좋은 설계 아이디어를 가진 작은 회사들이 팹 하나를 지을 자본이 없어서 제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TI에서 고객사 칩을 대신 만들어줄 때 이익률이 자체 제품보다 높았던 경험을 기억했습니다. General Instrument 재직 시절에는 팹 없이 설계만 하는 회사를 차리려는 한 창업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대만에서 아시아 반도체 공장들이 미국 공장보다 수율(Yield)이 높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목격했습니다.
아이디어가 결합됐습니다.
"설계는 고객이 하고, 나는 제조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만들면 어떨까?"
세 개의 팹을 각각 짓는 대신, 하나의 공용 팹을 만들어 누구에게나 위탁 생산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세운다. 자체 칩 설계는 하지 않는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오직 만들기만 한다. 이것이 파운드리(Foundry) 모델의 개념이었습니다.
당시 반도체 업계의 상식은 달랐습니다. "제대로 된 반도체 회사는 설계와 제조를 모두 직접 해야 한다." 설계와 제조를 분리하는 발상은 업계 상식에 정면으로 반했습니다.
6장 — 아무도 투자하지 않았다
모리스 창은 당시 반도체 산업의 주요 기업 모두에게 TSMC 투자를 요청했습니다.
인텔,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모토로라, AMD, 파나소닉, 소니 — 모두 거절했습니다. 업계에서 모리스 창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그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에는 아무도 돈을 걸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손을 든 곳은 뜻밖에도 네덜란드의 **필립스(Philips)**였습니다. 그런데 필립스가 투자한 이유도 아이러니했습니다.
TSMC의 사업 모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대만 정부의 환심을 사서 대만에서 저렴하게 공장을 운영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TSMC의 초기 자본은 대만 정부와 필립스, 그리고 민간 투자자들이 함께 댔습니다. 대만 정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필립스가 두 번째, 나머지를 민간 자본이 채우는 구조였습니다.
1987년 2월 21일, **대만 신주(新竹)**에 TSMC가 설립됐습니다. 세계 최초의 전문 파운드리 기업. 모리스 창의 나이 56세였습니다.
7장 — TSMC의 철학: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창업 초기 TSMC의 첫 고객들은 대만 국내 중소 IC 설계 회사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일부 해외 고객도 초기부터 함께했습니다. 아직 업계 전체가 TSMC를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TSMC가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기가 된 것은 인텔과의 관계였습니다. 인텔은 자사의 최첨단 공정 팹을 신형 칩 생산에 집중시키고 싶어 했고, 구형 제품 생산을 외부에 위탁할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TSMC에 시범 생산을 맡겼고, TSMC의 수율이 인텔의 기준을 충족시켰습니다. 인텔은 TSMC의 중요한 해외 고객이 됐습니다. 단, 엄격한 조건을 달았습니다. 품질 관리, 예방적 설비 유지, 통계적 공정 관리(SPC) 시스템을 구축할 것.
TSMC는 이 조건을 이행했습니다. 인텔이라는 이름이 고객사 목록에 오르면서, 업계의 시선이 서서히 달라졌습니다. 모토로라, TI, 필립스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뒤이어 생산을 위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TSMC가 지킨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자체 칩을 설계해 팔지 않는다는 이 원칙이야말로,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들이 자신의 가장 민감한 설계도를 TSMC에 믿고 맡길 수 있었던 근본 이유입니다.
8장 — 팹리스의 탄생, 산업 구조가 바뀌다
TSMC의 파운드리 모델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반도체 산업의 지형을 바꿨습니다.

TSMC가 안정적인 위탁 생산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하자, 이전까지 불가능했던 사업 모델이 가능해졌습니다. 막대한 자본을 들여 팹을 짓지 않고도, 설계만 잘하면 반도체 회사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팹리스(Fabless) 기업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퀄컴(Qualcomm)이 팹 없이 통신 칩을 설계했습니다. 브로드컴(Broadcom)이 네트워크 칩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엔비디아(NVIDIA)**가 GPU를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TSMC 창업 당시 모리스 창의 예측이 있었습니다. "팹을 짓는 비용이 계속 오를수록, 믿을 수 있는 위탁 생산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커진다. 그리고 그것은 팹 없는 설계 회사들의 폭발적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TSMC의 매출에서 팹리스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인 수준으로 커졌습니다.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이 연쇄를 만들었습니다.
9장 — "실리콘 방패"가 된 회사
2000년대를 지나면서 TSMC는 단순한 반도체 기업이 아니게 됐습니다.
반도체 경제학 시리즈에서 여러 차례 다뤘듯, TSMC는 오늘날 전 세계 첨단 파운드리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최첨단 공정에서는 사실상 독점적 지위에 가깝습니다. 애플의 아이폰 칩,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AMD의 CPU, 퀄컴의 스마트폰 프로세서가 모두 TSMC 공장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 집중이 하나의 지정학적 방패가 됐습니다. 실리콘 방패(Silicon Shield).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순간 전 세계 첨단 반도체 공급이 끊기는 구조. 억지력의 새로운 형태. 핵무기 대신 반도체가 전쟁을 억제합니다. 모리스 창이 1987년에 설계한 비즈니스 모델이 2020년대의 지정학을 규정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최근 TSMC는 미국 애리조나 공장 투자를 큰 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실리콘 방패의 방어력이 지리적으로도 확장되고 있는 셈입니다(정확한 투자 규모는 최신 공식 발표를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10장 — 56세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
모리스 창은 56세에 창업했습니다.
그 이전의 인생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박사과정의 벽, 두 회사에서의 좌절과 짧은 재임. 그러나 그 오랜 세월 속에서 그는 반도체 산업의 설계와 제조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수율을 어떻게 높이는지 알았습니다. 학습 곡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았습니다. 고객사 칩을 대신 만들어주는 것이 왜 높은 이익률을 낳는지 알았습니다. 아시아 제조 환경이 왜 유리한지 알았습니다.
그 지식들이 56세에 한꺼번에 결합됐습니다. 파운드리 모델은 갑자기 나온 발상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축적이 하나의 구조로 수렴된 결과였습니다.
이것이 모리스 창이라는 브랜드의 본질입니다. 지식은 실패 속에서도 쌓인다. 그리고 그것이 쌓일 만큼 쌓이면, 어느 순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질문 하나로 결합됩니다.
"설계는 고객이 하고, 나는 제조만 전문으로 하면 어떨까?"
마무리 — 브랜드로서의 TSMC, 인물로서의 모리스 창
TSMC는 소비자가 직접 고르는 브랜드는 아니지만, 거의 모든 전자기기의 보이지 않는 바닥을 받치는 브랜드입니다. 오늘날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 사용 중인 노트북, AI 서비스를 가능하게 하는 데이터센터의 칩 — 그 모든 것이 TSMC 공장을 거쳐 나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B2B 브랜드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이 된 사례. 자기 이름을 로고에 박지 않은 창업자가 산업 전체의 구조를 재설계한 사례. 56세의 나이에 연속된 좌절을 겪은 뒤 세운 회사가 국가의 지정학적 방어 자산이 된 사례.
모리스 창은 이 세 가지 사례를 동시에 구현한 사람입니다.
Ars longa, vita brevis. —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히포크라테스의 말입니다. 모리스 창은 이 격언을 인생 후반에 증명했습니다. 인생은 짧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안에 쌓인 지식이 만들어낸 구조는 오래갑니다. 지금도, 우리가 손에 든 모든 스마트 기기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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