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팜 — 기부를 레거시로 만든 브랜드, 1942년의 약속
옥스팜 — 기부를 레거시로 만든 브랜드, 1942년의 약속
이안 박의 질문
안녕하세요, 브랜드 헤리티지 연구자 이안 박입니다.
2026년 5월 16일 새벽, 강원도 인제의 산길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4명이 한 팀을 이뤄 100km를 38시간 안에 걷는 일. 순위도 없고, 트로피도 없습니다. 완주하면 받는 것은 메달 하나와, 자신이 모금한 기부금이 지구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사실뿐입니다.
이 행사의 이름은 옥스팜 트레일워커(Oxfam Trailwalker).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브랜드가 바로 옥스팜(Oxfam) 입니다.
오늘은 이 브랜드의 아카이브를 열어보려 합니다. 옥스팜은 제품을 팔지 않습니다. 가치를 팝니다. 아니, 정확히는 — 가치를 남깁니다.
1942년, 영국 옥스퍼드의 작은 회의실
브랜드의 시작을 이해하려면 전쟁 중의 유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영국 옥스퍼드. 연합군은 나치 독일이 점령한 그리스 해역을 해상 봉쇄하고 있었습니다. 전략적으로는 옳은 결정이었지만, 그 결과 그리스 민간인들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기근의 사망자는 하루 1,500명에 달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한 옥스퍼드의 퀘이커 교도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대학 교수들이 모였습니다. 1942년 10월 5일, 그들은 옥스퍼드 세인트 메리 더 버진 대학 교회의 구 도서관에서 첫 모임을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옥스퍼드 기아구호위원회(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 가 탄생했습니다. 나중에 이 긴 이름의 앞 두 글자를 합쳐 Oxfam이 됩니다.
초기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영국 정부에 봉쇄 완화를 요청해 그리스에 식량을 보내는 것. 하지만 로비가 뜻대로 되지 않자, 그들은 방향을 바꿉니다. 직접 모금해서 직접 보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해산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항상 굶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브랜드의 가장 강한 뿌리는 창립자의 분노에서 옵니다. 옥스팜은 불의에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분노로 태어났습니다.
세계 최초의 자선 상점, 그리고 브랜드의 발명
1947년 11월, 옥스팜은 세계 역사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킵니다.
영국 옥스퍼드 브로드 스트리트(Broad Street) 17번지에 작은 가게 하나가 열렸습니다. 사람들이 기증한 물건을 팔아 기금을 마련하는 공간, 세계 최초의 자선 상점(Charity Shop) 이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개념이지만, 당시에는 전례 없는 발상이었습니다. 누군가의 헌 옷이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식량이 된다는 연결 고리를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기부라는 행위를 일상의 쇼핑으로 끌어내렸고, 그 결과 훨씬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안 박이 주목하는 것은 이 구조의 천재성입니다. 옥스팜은 기부자를 소비자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선의로 기증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합리적 가격에 물건을 사고, 그 차익이 기금이 됩니다. 누군가의 버린 것이 누군가의 새 것이 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이 바뀝니다. 세 겹의 가치 교환이 하나의 상점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 구조가 가진 또 하나의 의미는 지속 가능성입니다. 기부금에만 의존하는 조직은 경기가 나빠지면 위기를 맞습니다. 하지만 상점은 사람들이 물건을 버리는 한 — 그리고 누군가 더 저렴하게 사고 싶은 한 — 멈추지 않습니다. 옥스팜은 선의와 합리성을 동시에 작동 원리로 삼은 조직이었습니다.
트레일워커 — 군사 훈련이 세계적 기부 프로젝트가 되다
1981년, 홍콩.
영국군 소속 구르카(Gurkha) 병사들이 홍콩 맥리호스 트레일(Maclehose Trail) 100km를 완주하는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브리게이디어 머빈 리(Brigadier Mervyn Lee)가 고안한 이 혹독한 군사 훈련은 단순히 강인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훈련의 이름은 Exercise Trailwalker.

그로부터 5년 후인 1986년, 옥스팜 홍콩이 이 훈련을 기부 행사로 전환합니다. 팀을 이뤄 100km를 걷고, 그 도전을 후원자들에게 알려 기부금을 모으는 방식. 군사 훈련이 시민 참여형 모금 이벤트로 탈바꿈한 순간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전환이 군사 훈련의 본질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100km, 여전히 48시간, 여전히 4명이 함께. 달라진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 고통의 이유가 생겼다는 것.
트레일워커는 이후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1997년 홍콩 반환 후 구르카 부대가 영국으로 이전하면서 영국 사우스 다운스(South Downs)로도 확장됐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벨기에, 인도, 일본, 프랑스, 독일, 스페인, 아일랜드, 그리고 한국까지. 현재 세계 10개국 이상에서 개최되는 글로벌 기부 프로젝트가 됐습니다.
한국에서는 옥스팜 코리아가 인제군과 함께 매년 5월 트레일워커를 개최합니다. 국내에서만 지금까지 13억 원 이상이 모금됐습니다. 2026년 대회는 5월 16~17일, 강원도 인제 설악산 자락 100km 코스에서 진행됐습니다. 완주를 위해 누군가는 몇 달 전부터 훈련하고, 후원금을 모으고, 팀원들과 새벽을 함께 걷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곧 기부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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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팜이 파는 것 — 불편한 숫자와 변화의 가능성
옥스팜은 매년 다보스 포럼 직전, 전 세계 부의 불평등을 집계한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불편하고 도발적인 숫자들입니다.

2026년 1월 발표된 옥스팜 보고서('Resisting the Rule of the Rich')에 따르면, 세계 억만장자들의 부는 2025년 한 해 동안 16% 이상 증가해 역대 최고치인 18조 3,00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2020년 이후로는 무려 81%가 늘어났습니다. 같은 기간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은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거의 절반은 여전히 빈곤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옥스팜은 이 숫자를 해마다 발표합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계속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진실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 그것이 옥스팜이 브랜드를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지점에서 옥스팜이 다른 브랜드들과 구별되는 본질입니다. 대부분의 브랜드는 소비자에게 기분 좋은 것을 팝니다. 옥스팜은 소비자에게 불편한 것을 제시하고, 그럼에도 함께하자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요청에 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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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티지로서의 기부 — 브랜드가 80년을 버티는 법
옥스팜은 현재 22개 독립 조직이 연합한 컨페더레이션(confederation) 구조입니다. 77개국에서 활동하며, 수천 개의 현지 파트너 조직과 협력합니다. 옥스팜 영국, 옥스팜 아메리카, 옥스팜 코리아 등 각각의 조직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도 하나의 이름 아래 모입니다.

이 구조가 가능한 이유는 이름이 곧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옥스팜이라는 네 글자 안에는 1942년 그리스 기근에 분노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 마음이 80년 이상 이어지는 동안, 중고 의류를 팔고, 100km를 걷고, 보고서를 발표하는 수많은 방식으로 표현됐습니다.
형태는 달라도 본질은 같습니다. 배고픈 사람 옆에 앉아 있겠다는 약속.
이안 박의 브랜드 서재에서 옥스팜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브랜드 헤리티지는 제품의 역사입니다. 더 좋은 가방, 더 정교한 시계, 더 아름다운 향수. 하지만 옥스팜의 헤리티지는 관계의 역사입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과 도움을 준 사람 사이에 생긴 연결들이 겹겹이 쌓인 것입니다.
그 연결은 제품처럼 낡지 않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가치를 헤리티지로 만든 또 다른 브랜드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 파타고니아 — 지구가 유일한 주주가 된 날
이안 박의 마무리
인제의 산길을 38시간 동안 걸어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참가자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겁니다. "내가 걷는 거리가 누군가의 하루가 되기 때문에."
그 대답 안에 옥스팜이라는 브랜드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1942년 옥스퍼드의 작은 회의실에서 시작된 약속. 세계 최초의 자선 상점에서 이어진 실험. 구르카 병사들의 훈련에서 탄생한 100km의 도전. 매년 다보스 직전 발표되는 불편한 보고서.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브랜드 안에서 일관되게 살아 있습니다.
다음 번 트레일워커 현수막을 지나칠 때, 혹은 옥스팜 중고 상점 앞을 걸어갈 때, 그 작은 것들 안에 담긴 80년의 약속을 한번 유심히 보시길 권합니다. 소유하지 않아도, 옥스팜이 지켜온 관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곧 브랜드입니다.
다음 브랜드 아카이브 예고
코카콜라 vs 펩시 — 100년의 전쟁, 맛이 아니라 문화가 이겼다
붉은 캔과 파란 캔이 싸운 한 세기. 두 브랜드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자신을 각인시킨 방법을 이안 박의 브랜드 서재에서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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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Oxfam Official History (oxfam.org.uk), Oxfam America History (oxfamamerica.org), Wikipedia – Oxfam, Wikipedia – Trailwalker, Quakers in the World – Origins of Oxfam (1942~1951), EBSCO Research Starters – 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 Oxfam International – Our History (oxfam.org), The Gurkha Welfare Trust – Trailwalker History, Oxfam Hong Kong – Trailwalker 2024, Oxfam International (2026) – Resisting the Rule of the Rich: Billionaire Wealth Report, 옥스팜 코리아 – 트레일워커 인제 국내 모금 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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