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서가

[편의점 서가] 베르톨리 — 이탈리아 이름, 스페인 기름, 일본 상표권: 한 병 안에 숨은 세 개의 국적

이안 박(Ian Park)의 브랜드 서재 2026. 7. 16. 09:51
반응형

[편의점 서가] 베르톨리 — 이탈리아 이름, 스페인 기름, 일본 상표권: 한 병 안에 숨은 세 개의 국적


안녕하세요,  이안 박입니다.

 

편의점 올리브유 코너 앞에 서서 라벨을 읽어본 적 있으신가요.

 

BERTOLLI. 짙은 초록색 병, 이탈리아풍 서체, 토스카나를 연상시키는 라벨 디자인. 대부분의 소비자는 이 병을 보는 순간 자동으로 이탈리아를 떠올립니다. 지중해의 태양, 올리브 농장, 이탈리아 할머니의 부엌. 브랜드가 의도한 연상 경로가 그대로 작동하는 순간입니다.

BERTOLLI, 한 병 안에 숨은 세 개의 국적

그런데 그 병 안의 기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 기름을 만든 회사는 어느 나라 기업일까요. 그리고 'BERTOLLI'라는 이름을 법적으로 소유한 곳은 어디일까요.

 

세 질문의 답이 모두 다릅니다.

 

오늘 이안 박은 베르톨리라는 이름 안에 겹겹이 쌓인 국적들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구조가 브랜드 역사에서 얼마나 드문, 그러나 실은 얼마나 교과서적인 사례인지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장 — 루카에서 시작한 이름: 1865년의 프란체스코 베르톨리

이야기는 1865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루카(Lucca)에서 시작됩니다.

루카에서 시작한 이름 — 1865년 프란체스코 베르톨리

프란체스코 베르톨리(Francesco Bertolli)와 그의 아내 카테리나(Caterina)는 작은 식료품상을 열었습니다. 올리브유, 와인, 치즈, 올리브. 당시 루카는 이탈리아 올리브유 교역의 주요 거점이었습니다. 오일 상인들의 도시였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성(姓)을 상표로 삼았습니다. 19세기 식료품 상인의 이름 브랜딩 방식입니다. 자기 이름이 곧 품질 보증이었습니다. 잘못 팔면 자기 이름이 더럽혀지는 구조. 이 방식은 당시 유럽 장인 문화의 전형이었습니다.

 

1865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루카에서 프란체스코 베르톨리와 아내 카테리나가 회사를 창립했습니다. 그들은 와인, 치즈, 올리브, 올리브유 같은 식료품을 판매하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흥미로운 전환점은 1870년대입니다. 미국으로 이민한 이탈리아인들이 고향의 음식을 그리워하며 베르톨리 올리브유를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향 맛"을 찾는 이민자들의 향수가 브랜드의 첫 번째 수출 경로를 열었습니다.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로 퍼진 이 기름은 이탈리아 이민자 공동체의 부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기서 베르톨리는 단순한 올리브유가 아니라 **기억의 용기(container of memory)**가 됩니다. 기름 한 병이 고향을 담는 그릇이 된 것입니다. 이 감정적 연결이 베르톨리 브랜드 이미지의 가장 단단한 핵심이었습니다.

 

브랜드는 1972년까지 베르톨리 가족이 직접 경영했습니다. 100년이 넘는 가족 기업의 역사입니다.


2장 — 이름이 여행을 시작한 날: 1972년 이후의 분리

가족 경영이 끝난 1972년 이후, 베르톨리는 일련의 매각과 인수를 거칩니다.

이름이 여행을 시작한 날 — 1972년 이후의 분리

1994년 유니레버(Unilever)가 베르톨리를 인수했습니다. 세계 최대 소비재 기업 중 하나인 유니레버에게 베르톨리는 글로벌 식품 포트폴리오의 일부였습니다. 이 시점부터 베르톨리는 "이탈리아 가족 기업"이 아닌 "다국적 대기업 산하 이탈리아 브랜드"가 됩니다.

유니레버 시절 베르톨리는 글로벌 브랜드로 본격 팽창했습니다. 이탈리아산이라는 이미지는 강화됐지만, 실제 원료 조달은 이탈리아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 그리스, 튀니지산 올리브유를 블렌딩하는 방식은 이미 이 시기에 정착됐습니다.

 

그리고 2008년, 결정적인 분기점이 옵니다.

 

2008년 유니레버는 올리브유 사업부를 스페인의 그루포 SOS(현재 데올레오, Deoleo)에 약 5억 파운드에 매각했습니다. 이 거래에는 이탈리아의 마야(Maya), 단테(Dante), 산 조르조(San Giorgio) 올리브유 브랜드와 밀라노 인근 인베루노 공장도 포함됐습니다.

스페인 기업이 이탈리아 올리브유 브랜드를 사들인 것입니다.

 

이후 베르톨리는 더 잘게 쪼개졌습니다. 2012년 냉동식품 사업부는 미국 콘아그라(ConAgra)로, 2014년 북미 파스타 소스 사업부는 일본 미즈칸(Mizkan Holdings)에 21억 5,000만 달러에 매각됐습니다. 미즈칸은 이 거래를 통해 베르톨리 브랜드와 상표권을 획득하고, 데올레오, 콘아그라, 유니레버에 라이선스를 부여했습니다. 2018년에는 마가린 사업부가 업필드(Upfield, 현재 플로라 푸드 그룹)로, 2021년에는 유럽 파스타 소스·마요네즈 사업이 네덜란드 엔리코-글라스베스트(Enrico-Glasbest)로 이전됐습니다.

 

한 이름이 이렇게 많은 소유주에게 분산된 사례는 드뭅니다.


3장 — 세 개의 국적: 이름과 기름과 소유권의 분리

정리하면 현재 베르톨리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세 개의 국적 — 이름과 기름과 소유권의 분리

상표권(Bertolli 브랜드 이름의 법적 소유): 일본 미즈칸(Mizkan Holdings). 미즈칸은 1804년 창업한 일본 식초 제조 회사입니다. 전통적으로 간장·식초·다시 계열을 만들던 이 기업이 이탈리아 올리브유 브랜드의 법적 주인이 됐습니다.

 

올리브유 사업 운영: 스페인 데올레오(Deoleo). 세계 최대 올리브유 병입(bottling) 기업입니다. 베르톨리, 카라펠리(Carapelli), 콜리자네(Koipe) 등 복수의 올리브유 브랜드를 운영합니다.

 

원료 산지: 주로 스페인, 튀니지, 그리스, 이탈리아 일부. 지중해 전역에서 수입된 올리브를 블렌딩합니다.

 

요소 실제

브랜드 이름의 기원 이탈리아 토스카나 루카
상표권 소유 일본 미즈칸(Mizkan Holdings)
올리브유 사업 운영 스페인 데올레오(Deoleo)
주요 원료 산지 스페인·튀니지·그리스 (이탈리아 일부)
소비자 인식 이탈리아 프리미엄 올리브유

 

이안 박이 이 표를 처음 만들었을 때, 잠시 멈춰서 생각했습니다. 이름·소유권·원료·소비자 인식이 이렇게 완전히 분리된 브랜드가 세계에 또 있을까.

 

그리고 이 구조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식품 브랜드의 매우 전형적인 형태라는 점이 더 흥미롭습니다.


4장 — 필리포 베리오와 닮은 거울: 또 다른 분리 구조

베르톨리 옆에 놓인 다른 초록색 병을 보겠습니다. **필리포 베리오(Filippo Berio)**입니다.

필리포 베리오와 닮은 거울 — 또 다른 분리 구조

필리포 베리오를 생산하는 이탈리아 살로브(Salov) 그룹은 2014~2015년 중국 국영 식품 그룹 브라이트 푸드(Bright Food)가 지배지분을 인수했습니다. 1850년 이탈리아 상인 필리포 베리오의 이름에서 출발한 브랜드가, 이제는 상하이 국영기업 산하에 있습니다.

 

살로브는 현재 이탈리아 토스카나 마사로사에 본사를 두고,  연간 매출 약 5억 유로, 판매량 1억 리터 이상을 기록하며 70개국에 수출합니다. 생산은 이탈리아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베르톨리와 필리포 베리오는 구조적으로 닮았습니다. 이탈리아 인명에서 출발한 브랜드, 지중해 전역에서 조달한 원료, 그리고 아시아 자본(일본·중국)의 소유. 두 브랜드를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패턴이 보입니다. 이탈리아가 브랜드를 만들었고, 세계가 그 브랜드를 사들였습니다.


5장 — 카놀라와 정반대 방향: 브랜딩의 두 전략

이안 박은 이 구조를 다른 기름과 비교해보고 싶습니다.

 

카놀라(Canola)는 새 이름으로 문제를 해결한 사례입니다. 유채기름(Rapeseed oil)이 가진 독성 논란과 부정적 어감을 털어내기 위해, 캐나다는 1978년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과거를 지우고 새 출발선을 그었습니다.

카놀라 리브랜딩의 전략과 역사가 궁금하다면 → [브랜드 아카이브] 카놀라 — 이름을 바꾸면 역사가 바뀐다 (이안박)

 

베르톨리는 정반대입니다. 오래된 이름에서 정당성을 끌어옵니다. 1865년이라는 숫자, 루카라는 지명, 프란체스코라는 인명. 이 모든 것이 "오래됨=신뢰"라는 등식으로 작동합니다. 원료가 스페인산이고 소유주가 일본 기업이어도, 소비자가 "이탈리아다"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 이름이 160년 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두 전략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카놀라는 실체(씨앗)가 바뀌었기 때문에 새 이름이 필요했고, 베르톨리는 실체는 분산됐지만 이름의 연속성이 소비자 신뢰를 유지시켰습니다.

 

브랜딩에서 이름은 다양한 방향으로 기능합니다. 과거를 지우는 무기가 되기도 하고, 과거를 호출하는 자산이 되기도 합니다.


6장 — PDO 인증: 이 분리 구조에 반격하는 시스템

베르톨리와 필리포 베리오 같은 브랜드가 만드는 문제는 명확합니다. 소비자가 "이탈리아산"이라고 인식하지만, 실제 원료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에서 오지 않습니다.

PDO 인증 — 이 분리 구조에 반격하는 시스템

유럽연합은 이 문제에 제도로 대응합니다. PDO(원산지 명칭 보호, 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 인증입니다. PDO 인증을 받은 올리브유는 재배·수확·압착·병입의 전 과정이 인증 지역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탈리아에는 현재 40개 이상의 PDO 올리브유 인증이 있습니다. 칼라마타 PDO는 그리스 특정 지역에서만 생산 가능합니다.

 

PDO는 블렌딩 제품과 단일 원산지 제품을 구분하는 선입니다. 베르톨리의 일반 제품은 그 선 바깥에 있습니다. PDO 인증 제품을 원한다면, 라벨에서 "DOP", "PDO", "원산지 보호" 표시를 확인해야 합니다.

 

2010년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대학 연구에서 베르톨리를 포함한 여러 주요 수입 브랜드가 엑스트라 버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샘플이 발견됐습니다. 2018년 데올레오는 관련 미국 집단소송에서 합의했습니다. 이것이 특정 브랜드의 고유한 문제라기보다, 블렌딩 구조와 긴 유통 경로가 만드는 카테고리 전반의 품질 변동성 문제입니다.

 

라벨이 가리키는 것과 병 안에 있는 것이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는 것. 이것이 이 시대에 올리브유를 선택하는 소비자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마무리 — 이름이 가리키는 것과 기름이 말하는 것

다음에 편의점에서 베르톨리 병을 집어들 때, 잠깐 뒤집어서 원산지 표기를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이탈리아산 혼합 올리브유" 또는 "지중해 지역산 올리브유"라는 문구가 보일 것입니다. 브랜드 이름과 원산지 사이에 있는 그 작은 간극이, 오늘 이안 박이 읽어드린 이야기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베르톨리는 나쁜 브랜드가 아닙니다. 1865년부터 이어진 진짜 역사가 있고, 그 이름이 만든 소비자 신뢰도 실재합니다. 다만 그 이름이 오늘날 가리키는 것이 처음과 같지 않다는 점, 그리고 이름·소유·원료·인식이 각각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읽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Nomina sunt consequentia rerum. — 이름은 사물의 결과다.

 

로마 법률격언입니다. 그러나 베르톨리를 보면 이 격언이 거꾸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름이 사물의 결과가 아니라, 이름이 사물보다 오래 살아남아 사물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소유하지 않아도, 한 이름 안에 국적이 몇 개나 숨어 있는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앎이 있습니다.


다음 글 예고

다음 편에서는 이름 대신 인증으로 프리미엄을 만든 그리스 올리브유의 이야기를 읽어보겠습니다.

 


브랜드 서재 by 이안 박

 

 

올리브유 경제학 — 기후플레이션과 공급망의 구조 → [기름의 경제학 5편] 올리브유 — 지중해가 세계의 부엌을 장악한 방법 (오십보)

카놀라 — 이름을 바꿔 역사를 바꾼 기름의 이야기 → [브랜드 아카이브] 카놀라 — 이름을 바꾸면 역사가 바뀐다 (이안박)

올리브유의 맛·역사·아그로마피아 이야기 → [음식으로 여는 세상] 올리브유 한 병의 이력서 (쫀쿠)

원산지 인증이 버터를 명품으로 만든 구조 → [편의점 서가] 명품 버터 — AOP가 버터를 명품으로 만드는 방식


태그

#베르톨리 #Bertolli #필리포베리오 #FilippoBerio #올리브유브랜드 #브랜드소유권 #원산지분리 #PDO인증 #올리브유혼합 #데올레오 #미즈칸 #브라이트푸드 #브랜드인수 #이탈리아브랜드 #지중해올리브 #브랜드헤리티지 #글로벌식품산업 #메이드인이탈리 #브랜드스토리 #브랜드헤리티지 #브랜드서재 #이안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