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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서가] 사브라(Sabra) — 후무스를 팔았는데, 전쟁이 따라왔다

이안 박(Ian Park)의 브랜드 서재 2026. 8. 7.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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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서가] 사브라(Sabra) — 후무스를 팔았는데, 전쟁이 따라왔다

냉장 코너 한 귀퉁이의 작은 통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가


미국 대형마트 냉장 코너에 가면 파란 라벨에 이름이 크게 박힌 통이 있습니다. Sabra. 뒤집어보면 원재료란에 chickpeas, tahini, garlic, lemon juice라고 적혀 있습니다. 재료만 보면 지극히 단순한 음식입니다. 그런데 이 통 하나가 불매운동을 부르고, 기네스 기록을 건드리고, 레바논과 이스라엘 사이의 외교전으로 번지고, 결국 수십 년의 공동 소유 구조를 해체시키는 데까지 이릅니다.

후무스 통과 국기들, 음식이 전쟁이 된 순간

후무스는 어떻게 단순한 딥소스를 넘어 정치적 물건이 됐을까요. 그리고 사브라는 어떻게 그 한가운데에 서게 됐을까요.


후무스(Hummus) — 이름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한다

아랍어로 **حُمُّص(ḥummuṣ)**는 그냥 '병아리콩'입니다. 요리 이름이 아니라 재료 이름입니다. 완전한 요리 이름은 حمص بطحينة (Hummus bi Tahina) — '타히니를 곁들인 병아리콩'이라는 뜻입니다.

후무스 어원과 역사 – 13세기 카이로부터 현대까지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13세기 카이로의 요리책 《Kitab Wasf al-Atima al-Mutada(맛좋은 음식의 묘사)》에 등장하는 Hummus kasa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다만 이 초기 레시피는 지금 우리가 아는 완성형과 다릅니다. 식초를 쓰고, 레몬과 마늘 없이 허브와 호두 등을 곁들여 차게 식힌 병아리콩 퓌레에 가까운 형태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다른 연구에서는 1250년대 시리아 알레포의 역사학자 이븐 알-아딤(Ibn al-'Adeem)이 남긴, 병아리콩·타히니·레몬·마늘을 곁들인 기록을 가장 오래된 '후무스 비 타히나'로 보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이 요리는 특정 국가가 아니라,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이집트·시리아를 아우르는 지역 전체의 식탁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현대식 조합이 정확히 언제, 어느 부엌에서 완성됐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것입니다. 후무스라는 단어는 어느 한 나라의 고유 언어가 아니라, 이 지역 전체가 수천 년 동안 공유해온 아랍어입니다. 레바논도, 시리아도, 팔레스타인도, 이집트도, 그리고 아랍어를 쓰는 이스라엘의 아랍계 시민도 — 모두 같은 단어로 이 음식을 불러왔습니다. 누군가의 소유였다기보다, 어느 지역 전체에 속한 음식이었습니다.


가스트로내셔널리즘 — 음식이 국기를 달기 시작할 때

20세기 이전에는 후무스가 분쟁을 일으킨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 지역의 누구나 먹었고, 그 지역의 누구나 만들었습니다. 분쟁이 시작된 건 국경선이 생긴 이후, 정확히는 이스라엘이 1948년 건국된 이후부터입니다.

가스트로내셔널리즘 – 음식이 국기를 달기 시작할 때

새로운 국가는 새로운 국민 서사가 필요합니다. 건축, 음악, 언어, 음식 — 무엇이든 '우리 것'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을 학자들은 **가스트로내셔널리즘(Gastronationalism)**이라 부릅니다. 음식을 통해 국가 정체성을 구축하는 정치적 행위입니다. 후무스, 팔라펠, 샤와르마, 라브네(Labneh) — 이것들이 '이스라엘 음식'으로 세계 시장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아랍권에서는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레바논의 입장은 간명했습니다. "우리가 수천 년 동안 먹어온 음식을, 이제 막 세워진 나라가 자기 음식이라고 파는 건 문화 도용(cultural appropriation)이다." 이스라엘의 입장도 나름의 논리가 있습니다. "이 지역에 살아온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먹어온 음식이고, 이스라엘 요리 문화의 일부인 건 사실이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게 문제의 본질입니다. 후무스는 한 나라가 독점할 수 없는 음식인데, 시장에서는 누군가가 먼저 이름을 붙인 쪽이 이깁니다.


2008년 레바논의 선전포고 — 그런데 무기는 타히니였다

2008년, 레바논 산업인협회(Association of Lebanese Industrialists)는 EU에 공식 청원을 넣었습니다. 후무스를 비롯한 여러 레바논 요리를 원산지 명칭 보호(PDO) 인증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프랑스 샴페인이나 이탈리아 파르마 햄처럼, '후무스 = 레바논'이라는 원산지 보호를 법으로 못 박자는 시도였습니다.

 

EU는 거절했습니다. 이미 중동 전역에서 만들어온 음식이니 특정 국가에 귀속시킬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법적 전투는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레바논은 전략을 바꿨습니다. 기네스 기록으로 갔습니다.

기네스 기록 전쟁 – 레바논 vs 이스라엘 2009-2010

 

2009년, 레바논의 요리사들이 약 2톤 규모의 후무스 접시를 만들어 기네스 세계 기록에 도전했습니다. 당시 공식 선언은 거의 선전포고 수준이었습니다. "레바논이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이 기록을 등재한다." 음식으로 국제적 정통성을 선점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2010년, 이스라엘 아랍계 마을 아부 고시(Abu Ghosh)의 요리사들이 약 4톤 규모의 후무스를 만들어 기록을 탈환했습니다. 레바논은 같은 해 다시 도전해, 기네스 공식 기록에 등재된 10,452kg의 후무스 접시로 재탈환했습니다. 병아리콩으로 치러진 기록 전쟁이었습니다.

 

레바논 2009: 약 2톤 → 이스라엘 2010: 약 4톤 → 레바논 2010: 10,452kg (기네스 공식 등재)


사브라(Sabra) — 이름 자체가 선언이었다

이 모든 분쟁의 한복판에, 사브라라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사브라 브랜드 구조 – 스트라우스+펩시코 합작→펩시코 완전 인수

사브라는 1986년 뉴욕에서 이스라엘계 이민자들이 창업했습니다. 브랜드명 Sabra는 히브리어로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유대인을 뜻하기도 하고, 선인장 열매인 사브라(צבר, tzabar)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겉은 가시투성이이지만 속은 달콤하다 — 이스라엘 토박이 세대를 묘사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입니다. 즉 브랜드 이름 자체가 이스라엘 정체성 선언이었습니다.

 

2005년 이스라엘 대형 식품기업 **스트라우스 그룹(Strauss Group)**이 사브라 지분 51%를 약 900만 달러에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세계 최대 식음료 기업 중 하나인 **펩시코(PepsiCo)**가 스트라우스와 50대 50 합작 구조를 맺으며 사브라를 미국 전역의 냉장 유통망에 올려놓았습니다. 펩시코가 가진 것은 단 하나였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월마트, 코스트코, 크로거에 이르는 미국 전역의 냉장 물류 시스템.

 

그 결과는 극적이었습니다. 이후 사브라는 미국 후무스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는 압도적 1위 브랜드가 됐습니다. 팔레스타인 문화의 상징 중 하나인 음식이, 이스라엘 정체성 이름을 달고, 미국 최대 식음료 기업의 유통망을 타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에서 팔렸습니다. 이것이 분쟁의 구조였습니다.


BDS와 스트라우스 — 후무스통의 라벨을 뒤집은 사람들

2008년 이후 BDS(보이콧·투자 철수·제재) 운동은 사브라를 주요 불매 대상 중 하나로 지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스트라우스 그룹이 자사 웹사이트에 이스라엘 방위군(IDF) 특정 부대(골라니·기바티 여단)를 후원하는 프로그램을 공개적으로 홍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BDS 불매운동과 시장점유율 변화 – 60%→31%→38% 추이

 

후무스를 사면 스트라우스에 돈이 가고, 스트라우스는 그 돈으로 IDF를 후원한다는 논리였습니다. 특히 2023년 가자 전쟁 이후 불매운동은 미국 내 대학 캠퍼스와 도심 마트를 중심으로 눈에 띄게 강해졌습니다. 매장에서 반이스라엘 스티커가 사브라 제품에 붙여지는 사건들이 보고됐고, 소셜미디어에서 "사브라 불매" 캠페인이 확산됐습니다.

 

스트라우스는 대응했습니다. IDF 후원 내용을 영문 웹사이트에서 삭제했습니다. 하지만 불매운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브라는 한때 60% 이상을 점유할 정도로 독주했지만, 2021년 살모넬라 오염 가능성으로 대규모 리콜이 발생해 공장이 일시 가동 중단됐고, 이후 점유율 회복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기에 경쟁 브랜드의 성장과 BDS를 포함한 불매운동이 겹치면서, 시장점유율은 2022년 31%까지 떨어졌다가 2023년 무렵 약 37~38% 수준으로 다소 회복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리콜과 불매운동의 정확한 인과관계를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사브라가 예전만큼 시장을 지배하지 못하는 브랜드가 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2024년 11월, 스트라우스 그룹은 결국 보유 지분 50%를 펩시코에 약 2억 4,400만 달러에 매각해 합작 구조를 종료했습니다. 브랜드를 만든 쪽이 떠난 것입니다. 사브라는 이제 완전한 펩시코 자회사입니다. 이스라엘 정체성을 내세운 이름의 브랜드가, 이스라엘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미국 기업의 제품으로 남게 됐습니다.


후무스 전쟁의 아이러니 — 정작 원산지는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

이 모든 전쟁에서 가장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레바논도, 이스라엘도 — 사실 후무스의 '최초 원산지'라고 결정적으로 주장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13세기 카이로의 요리책에 후무스가 등장할 때, 그 지역은 레바논도 이스라엘도 아닌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였습니다. 병아리콩 자체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 — 지금의 터키 남동부와 시리아 일대 — 에서 약 7,500~10,000년 전에 처음 재배화됐습니다. 후무스라는 요리가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집의 부엌에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역사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콩의 경제학 3편에서 다뤘듯, 후무스는 이 지역 전체의 음식이었습니다.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스라엘의 아랍계와 유대계 가정 — 모두가 오랫동안 먹어왔고, 모두가 자기 어머니의 조리법을 갖고 있습니다. 언어학적으로도 'hummus'라는 단어는 아랍어에 뿌리를 두고 있어, 히브리어가 이 이름을 만든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시장에서는 먼저 이름을 붙이고 유통망을 만든 쪽이 이겼습니다. 사브라가 미국 후무스 시장의 60%를 가져간 것은 가스트로내셔널리즘의 승리가 아니라, 냉장 유통망의 승리였습니다. 펩시코의 물류가 없었다면, 사브라라는 이름이 아무리 강력한 정체성 선언을 담고 있어도 전국 마트 진열대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편의점 냉장 코너에서 후무스를 집어든다는 것

2025년 오늘, 한국 편의점 냉장 코너에도 후무스가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아리콩 딥', '지중해식 스프레드', '고단백 허머스' — 라벨마다 표현이 다릅니다. 어느 나라 음식이라는 표기는 없습니다. 원산지 분쟁은 한국 소비자의 장바구니까지 도달하지 않은 채, 그냥 '건강한 이국 음식'으로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통을 잠깐 뒤집어보면 생각할 거리가 생깁니다. 이 음식에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인가. 이 음식의 레시피를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지금 이 음식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누구인가.

 

후무스는 수천 년 동안 아무 이름 없이 그냥 그 지역 사람들의 음식이었습니다. 국기도, 특허도, 기네스 기록도 없이 — 그냥 식탁 위에 있었습니다. 분쟁은 음식이 시장이 됐을 때 시작됐습니다. 음식에 브랜드가 붙는 순간, 음식은 문화에서 자산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자산에는 반드시 소유권 분쟁이 따라옵니다.

 

사브라는 그 이동의 가장 극적인 사례 중 하나입니다.


브랜드 서재 by 이안 박 | brand-archive.com "음식에 브랜드가 붙는 순간, 음식은 문화에서 자산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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