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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서가] 하리보 — 작은 부엌에서 시작된 단어, 곰 한 마리가 세계를 바꾼 이야기

by 이안 박(Ian Park)의 브랜드 서재 2026.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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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서가] 하리보 — 작은 부엌에서 시작된 단어, 곰 한 마리가 세계를 바꾼 이야기

 


안녕하세요,  이안 박입니다.

 

편의점 계산대 옆에는 늘 작은 봉지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투명한 비닐 안에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 흰색 작은 곰들. 2센티미터짜리 곰 한 마리, 무게 1그램.

 

이 작은 것이 100여 개 나라에서 팔리고, 연간 100억 개 이상 생산됩니다. 그리고 이 물건의 이름에는 사람 이름과 도시 이름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이름부터 열어보겠습니다.


1장 — Gum, Gummi, Gummy: 한 단어의 오랜 여행

**Gum(검)**이라는 영어 단어는 중세 영어 gomme, 그 이전 중세 프랑스어, 그리고 라틴어 gummi에서 왔습니다. 그리스어 kommi는 학자들에 따라 이집트어 계통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카시아 나무 수액을 굳힌 천연 수지, 즉 gum arabic이 이집트에서 지중해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단어도 함께 건너온 것이죠.

Gum → Gummi → Gummy 한 단어 여행 (이집트 아카시아 수액 → 라틴 → 중세 영어)

 

Gummy는 gum의 형용사형, "고무처럼 쫄깃한"이라는 뜻입니다. 구미(Gummy) 사탕이라는 이름은 수천 년을 거쳐온 단어 하나로 오늘의 식감을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2장 — HAns RIegel BOnn: 이름이 곧 역사인 브랜드

1920년 12월, 독일 본(Bonn) 케세니히 지역의 한 작업장. 한스 리겔(Hans Riegel, 1893~1945)이라는 제과사가 회사를 설립합니다. 남은 초기 장비 목록은 설탕 자루 하나, 대리석 석판, 구리 냄비, 롤링 핀 — 공장이 아니라 부엌 수준이었습니다. 1921년에는 아내 게르트루트(Gertrud)가 첫 직원으로 합류해 자전거로 직접 납품을 다녔습니다.

HA ns  RI gel  BO nn — 6글자에 좌표 담기 (1920 본)

 

회사 이름을 짓는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HAns RIegel BOnn — 창업자 이름 앞 두 글자씩, 도시 이름 앞 두 글자. HARIBO. 단순한 약자가 아니라 창업자와 장소를 동시에 담은 좌표입니다.

 

창업 당시 작업장이 있던 본 케세니히는 지금도 하리보 역사에서 중요한 거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본사는 라인강 건너 그라프샤프트로 이전했지만, 'HA-RI-BO'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도시 자체는 여전히 하리보의 상징입니다.


3장 — 탄츠베어(Tanzbär): 춤추는 곰이 세상에 나온 날

1922년, 한스 리겔은 과일 맛 젤리 곰을 개발하고 **탄츠베어(Tanzbär, '춤추는 곰')**라 이름 붙입니다. 당시 유럽 거리에는 곰을 데리고 다니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추게 하는 광대들이 흔했고, 그 이미지를 사탕에 옮긴 것입니다.

1922 Tanzbär → 1960 Goldbären → 1967 등록 → 6가지 맛

 

1960년대 초, 하리보는 곰 젤리를 **'골드베어(Goldbären)'**로 리뉴얼했고, 1967년 독일 특허청에 상표로 공식 등록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곰의 체형과 발 모양을 지금과 비슷한 둥글고 컴팩트한 실루엣으로 정리했는데, 1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디자인 변화 중 하나였습니다.

🌟 골드베어 클로즈업 (투명 봉지 + 노란 곰 + 레몬·라즈베리·오렌지·딸기·파인·사과 6색)

 

처음에는 라즈베리·레몬·오렌지 세 가지 맛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딸기·파인애플·사과까지 더해져 여섯 가지 대표 맛으로 늘어났습니다. 국가별 구성은 조금씩 다르지만, 맛의 세계는 확실히 두툼해졌습니다.


4장 — 바이마르 공화국의 달콤한 생존

하리보가 창업한 1920년의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배상금과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겹친 혼란기였습니다. 그 한가운데서 설탕 한 자루로 시작한 가게가 살아남았습니다. 1923년 첫 배달 자동차를 구입했고, 1930년대에는 독일 전역에 영업망이 생겨 1933년에는 직원 400명 규모의 중견 기업이 됩니다.

🌟 1920 본 작업장 + 설탕 자루·구리 냄비 + 슬로건 "Kinder froh · Erwachsene ebenso"

 

같은 시기 슬로건이 탄생합니다.

"Haribo macht Kinder froh, und Erwachsene ebenso."
(하리보는 어린이를 기쁘게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도.)

 

초기에는 '어린이를 기쁘게'라는 메시지가 중심이었고, 이후 '어른들도(Erwachsene ebenso)'가 더해지며 세대 구분 없는 사탕 브랜드를 상징하는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5장 — 전쟁, 죽음, 그리고 30명으로의 재건

1945년, 한스 리겔이 52세로 사망합니다. 전쟁으로 공장은 파괴되고 원자재는 바닥나, 하리보는 직원 30명 규모로 축소됩니다. 아내 게르트루트가 잠시 경영을 맡은 뒤, 1946년 두 아들 한스 리겔 주니어(상업·마케팅)와 파울 리겔(생산·기술)이 공동 경영권을 이어받습니다. 파울이 발명한 리코리스 와인딩 기계는 이후 하리보의 상징적 생산 기술이 됩니다.

 

전후 독일의 경제 기적(Wirtschaftswunder)과 맞물려, 1950년대 초 하리보의 직원 수는 다시 1,000명대로 회복됩니다.


6장 — 글로벌 확장: 24년 광고와 미국 상륙

1962년 독일 TV에 첫 광고를 낸 하리보는, 1991년부터 2015년까지 독일의 유명 엔터테이너 **토마스 고트샬크(Thomas Gottschalk)**를 광고 모델로 기용합니다. 24년간 이어진 단일 모델 파트너십은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랐습니다.

1991→2015 토마스 고트샤크 24년, 세계 100억 개, 비건 구미 트렌드

 

미국 진출은 1980년대 초 시작돼 1982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사무소 개설로 이어졌고, 2010년대 후반 하리보는 미국 구미 사탕 시장 판매량 1위 브랜드로 올라섭니다. 현재 하리보는 약 200개 가까운 나라에 유통되고, 11개국 16개 생산 시설에서 약 8,500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7장 — 트롤리와 구미 웜: 경쟁자가 장르를 넓힌 방식

하리보가 곰을 발명했다면, 트롤리(Trolli)는 지렁이를 발명했습니다. 1948년 빌리 메데러(Willy Mederer)가 독일에서 창업한 이 회사는 1980년대 초 **구미 웜(Gummy Worm)**을 출시합니다 — 지렁이 모양, 양끝이 다른 색, 신맛 코팅. 하리보의 귀여운 곰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구미 사탕의 언어를 확장한 것입니다.

 

트롤리 이전까지 구미 사탕은 '귀여운 것'이었습니다. 트롤리 이후, 구미 사탕은 '징그럽고 재미있는 것'도 될 수 있었습니다. 현재 트롤리는 이탈리아 페라라 그룹(Ferrara Candy Company) 소속입니다.


8장 — 2020년대 구미 시장: 사탕에서 기능식품으로

여러 시장조사 기관은 2020년대 중반 세계 구미 시장을 대략 120억~170억 달러 사이로 추정합니다. 변화의 중심은 기능성 구미(Functional Gummy) — 비타민 C, D, 멜라토닌, 콜라겐, 프로바이오틱스를 담은 제품으로, 연평균 한 자릿수 후반대 성장률이 전망됩니다.

 

또 하나의 흐름은 비건 구미입니다. 전통 구미의 핵심 원료인 젤라틴은 돼지 또는 소의 뼈와 가죽에서 추출하는데, 이 성분이 채식주의자와 특정 종교 소비자에게는 진입 장벽이 됩니다. 펙틴·한천·카라기난 등 식물성 대체 겔화제를 쓰는 비건 구미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중입니다.

 

하리보가 1920년에 발명한 식감 하나가, 100년 뒤 건강 기능식품 시장의 언어를 빌려 다시 확장되고 있는 셈입니다.


마무리 — 세 글자, 세 가지 의미

HARIBO. 여섯 글자 안에 사람 이름 하나와 도시 이름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어원을 따라가면 단어 하나가 이집트에서 왔고, 제품을 따라가면 1922년 본의 작은 부엌에서 시작됐으며, 역사를 따라가면 전쟁과 인플레이션을 넘어 100년 넘게 살아남은 가족 기업이 있습니다.

 

편의점 계산대 옆의 투명한 봉지 하나가 실은 꽤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곰 한 마리, 무게 1그램. 그 안에 이집트의 수지, 바이마르 공화국의 설탕 자루, 본의 자전거 배달, 그리고 100년의 슬로건이 녹아 있습니다.

 

다음 번 편의점 계산대 앞을 지나칠 때, 그 작은 곰 봉지를 한번 유심히 보시길 권합니다.

 

Parva sed potens. (작지만 강하다.)

소유하지 않아도, 곰 한 마리에 담긴 100년의 생존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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