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서가] 크리스코(Crisco) — 라드를 죽이고, 트랜스지방으로 되살아나고, 다시 한 번 죽은 브랜드
안녕하세요, 이안 박입니다.
오늘은 편의점 서가에서 조금 다른 자리에 서 있는 물건을 꺼내봅니다.
편의점 기름 코너의 맨 끝. 아무도 잘 보지 않는 그 자리에 종종 놓인, 흰색의 두꺼운 반고체. 쇼트닝이라고 불리는 그 물질. 이름을 보면 Crisco(크리스코).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미국 주방에서 이 이름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라드를 밀어내고, 트랜스지방 논쟁의 중심에 서고, 두 번 다시 그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한 채 조용히 제조사가 바뀐 브랜드입니다. 그 이야기는 면화 씨앗에서 시작됩니다.
1장 — 목화씨의 골칫거리, 그리고 어느 화학자의 발견
19세기 미국 남부의 면화 농가에는 매년 거대한 씨앗 더미가 쌓였습니다. 면화 수확에서 섬유보다 씨앗의 비중이 더 큰 구조였고, 목화씨를 압착하면 기름이 나왔지만 초기에는 어둡고 냄새가 났습니다. 대부분 그대로 썩히거나, 비료로 사용했습니다. 이 씨앗이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한 화학자의 손이 필요했습니다.

데이비드 웨슨(David Wesson)이라는 화학자가 19세기 말, 산업적 표백과 탈취 기술을 개발하면서 면화유는 비로소 맑고, 무색무취의 중립적인 기름으로 변신했습니다. 이후 면화유는 액체 형태로 팔리거나, 동물성 지방과 섞어 반고체의 저렴한 쇼트닝으로 판매됐습니다. 브랜드 이름도 솔직했습니다. Cottolene, Cotosuet — 면화(Cotton)와 동물성 지방을 섞은 쇼트닝이라는 사실을 이름과 패키지 디자인에 그대로 표시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의 주방을 지배하던 것은 **라드(Lard)**였습니다. 가을에 돼지를 잡으면 집에서 직접 만들어 쓰던 돼지기름. 19세기 말이 되면서 육가공 회사들이 산업화 규모로 생산하기 시작했지만, 라드에는 돼지 특유의 냄새가 났고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면화유 쇼트닝들이 이 빈틈을 노렸지만, 아직 결정적인 기술이 없었습니다. 그 기술은 대서양 건너편 유럽의 연구실에서 먼저 나왔습니다.
2장 — 수소화, 비누에서 음식으로 건너온 화학
1903년, 독일 화학자 빌헬름 노르만(Wilhelm Normann)이 액체 유지에 수소를 첨가해 고체로 만드는 부분 수소화(Partial Hydrogenation) 공정을 특허로 등록했습니다. 원래 이 기술의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비누·양초 원료 확보. 액체 기름을 굳혀 더 안정적인 비누·양초용 지방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셉 크로스필드 앤 선스(Joseph Crosfield and Sons)라는 영국 회사가 이 특허를 매입했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의 수석 화학자 에드윈 카이저(Edwin C. Kayser)가 P&G(프록터 앤 갬블)로 이직하면서, 수소화 기술도 함께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P&G는 원래 이 기술로 비누 원료를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완성된 굳은 지방을 본 누군가가 생각했습니다.
이거, 비누보다 음식에 더 가깝지 않나?
P&G는 방향을 틀었습니다. 수년간의 연구 개발 끝에, 1911년 6월, 그들은 세계 최초로 동물성 지방 없이 순수 식물성 기름만으로 만든 고체 쇼트닝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Krispo, Cryst(종교적 연상이 있어 탈락)가 후보로 올랐다가, 최종적으로 Crisco — *Crystallized Cottonseed Oil(결정화된 면화유)*의 압축 조어 — 가 선택됐습니다.
이름은 원재료를 숨겼습니다. 완전히.
3장 — 마케팅이 라드를 죽인 방법
크리스코의 초기 마케팅은 식품 업계가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세 가지 전략이 동시에 전개됐습니다.

첫째, 원재료를 지우고 브랜드 신뢰를 심었습니다. 다른 쇼트닝 브랜드들이 '면화(Cotton)'를 자랑스럽게 이름에 새길 때, 크리스코는 달랐습니다. "100% 쇼트닝", "순식물성", "크리스코는 크리스코일 뿐" —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원재료 표기 의무가 없던 시절, P&G는 이 전략을 밀어붙였습니다. MSU 역사학자 헬렌 조이 바이트(Helen Zoe Veit)는 이 전략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소비자가 성분에 신경 쓰지 않도록 유도하고, 대신 브랜드를 신뢰하게 만드는 것."
둘째, 요리책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P&G는 크리스코 론칭과 동시에 모든 레시피에 크리스코가 들어가는 요리책을 무료로 배포했습니다. 파이 크러스트, 쿠키, 케이크, 튀김 — 미국 주방에서 기름이 필요한 모든 자리에 크리스코를 올려놨습니다. 소비자는 레시피를 따라 요리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리스코를 '요리의 기본값'으로 학습했습니다.
셋째, 코셔(Kosher) 마케팅이라는 틈새를 공략했습니다. 유대 율법에서는 육류와 유제품을 같은 식사에서 함께 쓰는 것을 금지합니다. 라드는 돼지기름이니 당연히 안 됩니다. 버터는 유제품이니 고기 요리에 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코는? 순수 식물성. 육류 요리에도, 제빵에도 쓸 수 있었습니다. P&G는 유대계 소비자 커뮤니티를 직접 공략하는 별도의 코셔 마케팅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이것이 미국 역사상 식품 기업이 특정 종교 커뮤니티를 겨냥해 마케팅한 초기 사례 중 하나입니다.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론칭 후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크리스코는 미국 가정에서 연 수천만 캔이 팔리는 '기본 기름'이 되었습니다. 라드는 점점 '구시대의 지방'으로 밀려났습니다.
4장 — "식물성 = 건강"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다
크리스코가 라드를 밀어낸 것은 맛과 기능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케팅이 심어놓은 관념, **"식물성은 동물성보다 건강하다"**는 프레임이 작동했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 관상동맥 심질환이 급증하자 과학계는 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생물학자 앤설 키스(Ancel Keys)는 1953년 **지방-심장 가설(Lipid-Heart Hypothesis)**을 발표했습니다. "포화지방 섭취가 혈중 콜레스테롤을 높이고, 심장병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라드, 버터, 코코넛오일 같은 포화지방 덩어리들이 악당이 됐습니다. 그 반대편에 크리스코와 부분 수소화 식물성 기름들이 '심장에 좋은 대안'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1980년대 중반, 미국 소비자 과학 공익 단체(CSPI)를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들도 당시에는 패스트푸드 업체들이 동물성 지방 대신 식물성 기름(주로 부분 수소화유)으로 전환하는 것을 심장 건강에 긍정적인 변화로 평가했습니다. 식물성 = 건강이라는 방정식이 이미 과학자와 소비자 모두의 마음속에 완성된 상태였습니다.
그 방정식 위에서 크리스코는 반세기 넘게 미국 주방을 지배했습니다.
5장 — 트랜스지방, 배신의 순간
1990년대 중반, 그 방정식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부분 수소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성되는 **트랜스지방(Trans Fat)**이 포화지방보다 심혈관 건강에 더 해롭다는 연구 결과들이 잇따라 발표됐습니다. 트랜스지방은 LDL(나쁜 콜레스테롤)은 높이고, HDL(좋은 콜레스테롤)은 낮추는 이중 타격을 가했습니다. 크리스코가 '건강한 식물성 쇼트닝'이라는 이름으로 반세기 동안 판 것의 정체가, 사실 라드보다 더 나쁜 지방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식품업계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는 연구를 직접 발주했습니다. 그런데 업계가 의뢰한 연구가 오히려 트랜스지방의 유해성을 재확인하는 결과를 내놓고 말았습니다. 후일 연구자 데이비드 슐라이퍼(David Schleifer)는 이렇게 썼습니다. "Industry meddles with science, but science meddles with industry."
사건은 빠르게 전개됐습니다. 2002년 미국 의학원(Institute of Medicine)이 트랜스지방의 안전 섭취 기준치는 사실상 0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IOM은 이후에도 트랜스지방 섭취를 "가능한 0에 가깝게 줄여야 한다"고 반복해서 권고했습니다. 뉴욕시는 2006년 레스토랑에서의 트랜스지방 사용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2007년 1월 24일, 당시 크리스코를 소유하고 있던 J.M. Smucker사는 모든 크리스코 제품의 트랜스지방을 1인분 기준 1g 미만으로 줄인 새로운 레시피를 발표했습니다. 2015년, FDA는 부분 수소화 오일(PHO)이 더 이상 GRAS(일반적으로 안전하다고 인정되는 식품) 지위를 갖지 않는다고 공식 결정했고, 2018년부터는 미국 식품에서 PHO 사용이 사실상 전면 금지됐습니다.
크리스코를 탄생시킨 그 기술 — 부분 수소화 — 이 크리스코의 존재 이유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6장 — 브랜드 소유권의 표류
마케팅 신화가 무너지는 동안, 크리스코의 소유권도 표류했습니다.

1911년 P&G가 탄생시킨 크리스코는, 91년이 지난 2002년 P&G가 J.M. Smucker에 매각했습니다. 잼과 젤리로 유명한 스머커가 쇼트닝 브랜드를 갖게 된 이유는, 당시 P&G가 크리스코와 함께 묶여 있던 지프(Jif) 땅콩버터를 팔기 위한 거래 구조 때문이었습니다. 크리스코는 말하자면 끼워팔기 상품이었습니다.
2020년 12월, 스머커는 크리스코를 다시 B&G Foods에 매각했습니다. B&G Foods는 더 이상 크게 성장하기 어려운 브랜드들 — Ortega, Cream of Wheat, Green Giant 통조림 라인 등 — 을 포트폴리오로 모아두는 회사입니다. 크리스코는 그 목록에 조용히 추가됐습니다.
P&G(1911–2002) → J.M. Smucker(2002–2020) → B&G Foods(2020–현재)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인근 공장에서 지금도 생산되고 있는 크리스코는, 오늘날 대두유, 완전 수소화 팜유, 팜유의 혼합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트랜스지방은 없습니다. 하지만 완전 수소화 과정에서 나온 에스터 교환(Interesterification) 지방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라드를 이기기 위해 만든 지방이, 결국 라드 이야기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7장 — 크리스코가 남긴 것: 브랜드 신뢰와 성분 무지의 구조
크리스코의 가장 큰 유산은 제품이 아닙니다. 마케팅 구조입니다.

"성분이 무엇인지 묻지 말고, 브랜드를 믿어라." 1911년 크리스코가 심어놓은 이 설득의 문법은, 이후 스팸(Spam), 치토스(Cheetos), 프루트 룹스(Froot Loops) 같은 가공식품들이 그대로 따라 썼습니다. 미국의 식품 성분 표기 의무화는 1960년대 후반에야 시작됐습니다. 그 사이 수십 년 동안, 소비자는 '브랜드'를 성분에 대한 정보 대신 신뢰의 대체물로 학습했습니다.
카놀라 편에서 읽었듯, 카놀라는 '실체를 바꾸고 이름을 바꾸는' 방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크리스코는 반대였습니다. 이름은 유지하되, 실체를 숨겼습니다. 그 비밀이 100년 뒤에 터졌을 때, 브랜드는 이미 소유자를 두 번 바꿔가며 조용히 무대 뒤로 물러서 있었습니다.
하스 아보카도유가 '원재료 하나의 투명함'으로 프리미엄을 만들었다면, 크리스코는 '원재료 은폐의 신뢰'로 대중을 지배했습니다. 두 전략은 정반대였고, 두 브랜드의 결말도 정반대입니다.
마무리 — 흰색 캔 속의 미국
크리스코는 여전히 팔립니다.
미국 남부의 프라이드치킨, 남부식 비스킷, 홀리데이 파이 크러스트. 할머니가 쓰던 조리법을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주방에서 크리스코는 살아있습니다. 맛의 기억은 성분 논쟁보다 오래 남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브랜드로서의 크리스코는, 자신이 만들어낸 마케팅 신화의 붕괴를 살아내야 했습니다. "식물성은 건강하다"는 프레임을 직접 판매에 사용했고, 그 프레임의 과학적 기반이 흔들렸을 때 브랜드도 함께 흔들렸습니다.
다음에 편의점이나 마트의 기름 코너를 지날 때, 혹시 쇼트닝이 보인다면 한 번 집어보세요. 성분표를 읽어보세요. 그 라벨 뒤에 1911년 목화씨 더미에서 시작한 이야기, 비누를 만들려던 화학자의 실험, 요리책으로 라드를 밀어낸 마케팅 전략, 그리고 트랜스지방으로 무너진 한 세기의 신화가 담겨 있습니다.
Experientia docet. — 경험이 가르친다.
키케로의 격언입니다. 크리스코는 이 격언을 아주 비싼 방식으로 증명했습니다. 브랜드 신화도 과학 앞에서는 재검토된다는 것을.
브랜드 서재 by 이안 박
크리스코의 원재료, 면화유의 경제와 역사 → [식용유의 경제학 12편] 면화유
면화씨앗에서 출발한 또 다른 이야기 → [이야기 팬트리] 솜사탕
이름을 바꿔 역사를 다시 쓴 기름 → [편의점 서가] 카놀라유
원재료 하나로 프리미엄을 만든 반대 전략 → [편의점 서가] 하스 아보카도
로고 하나가 브랜드가 되는 방법 → [편의점 서가]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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