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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서가] 팬케이크 가루의 배신 — 이름은 팬케이크인데, 왜 다 만드나

by 이안 박(Ian Park)의 브랜드 서재 2026.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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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서가] 팬케이크 가루의 배신 — 이름은 팬케이크인데, 왜 다 만드나

 


안녕하세요, 이안 박입니다.

오늘은 편의점 서가에서 제과·제빵 코너 쪽으로 걸어갑니다.

 

진열대에 노란 봉지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오뚜기 핫케이크믹스. 1킬로그램짜리 봉지. 성인 손바닥 두 개 크기. 앞면에는 잘 구워진 팬케이크 사진이 있고, 뒷면에는 레시피가 적혀 있습니다. 팬케이크 만드는 법, 와플 만드는 법, 계란빵 만드는 법.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이 봉지 하나로 붕어빵, 호떡, 스콘, 심지어 케이크까지 만든다는 응용 레시피가 수천 개 올라와 있습니다.

 

이름은 팬케이크 믹스입니다. 그런데 팬케이크만 만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독특한 소비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 현상 안에는 브랜드 전략, 식품 과학, 그리고 한국 가정의 소비 문화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1장 — 1930년 기차 식당칸에서 시작된 이야기

만능 베이킹 가루의 역사는 미국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기차 식당칸의 영감 — 1930년, 칼 스미스의 비스킷

1930년 어느 날, 제너럴 밀스(General Mills)의 영업 임원 칼 스미스(Carl Smith)가 야간 기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습니다. 늦은 밤 식당칸에 들렀다가 갓 구운 따뜻한 비스킷을 먹었습니다.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그는 주방을 찾아가 요리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만들었습니까?

 

요리사가 설명했습니다. 밀가루, 베이킹파우더, 쇼트닝, 소금을 미리 섞어놓은 혼합물을 냉장고에 보관해두고, 주문이 들어오면 액체만 부어 굽는다고. 스미스는 즉시 이 아이디어를 본사로 가져갔습니다.

 

1931년, **비스퀵(Bisquick)**이 출시됐습니다. 가장 유명한 초기 상업용 베이킹 믹스 중 하나였습니다. 슬로건은 단순했습니다. "One mixing for pancakes, biscuits, dumplings, waffles and many more." 출시 이후 여러 레시피가 빠르게 개발되며 '만능 가루'로서의 가능성이 증명됐습니다.

 

이름은 비스킷(Biscuit)과 퀵(Quick)의 합성어였습니다. 한 가지 반죽이 여러 음식이 될 수 있다는 개념. 그러나 비스퀵은 이름에서 이미 '비스킷을 위한 가루'임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팬케이크는 부가 기능이었습니다.

 

한국은 이 순서를 뒤집었습니다.


2장 — 1971년 오뚜기, 팬케이크를 기본값으로 설정하다

1971년, 오뚜기는 핫케이크 가루를 출시했습니다.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초기 핫케이크 믹스였습니다.

한국의 베이킹 기본값, 오뚜기의 등장

그런데 이름이 흥미롭습니다. 비스킷이 아니라 **핫케이크(팬케이크)**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왜일까요. 1970년대 초 한국에서 비스킷은 이미 과자 공장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팬케이크는 달랐습니다. 미군 문화와 함께 들어온 '서양식 아침 식사'의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직접 만들 수 있는 서양 음식. 새로운 것, 특별한 것.

 

'핫케이크 가루'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일상의 이벤트를 약속했습니다. 오늘은 팬케이크를 만들어보자. 1970년대 한국 가정에서 팬케이크는 지금의 브런치 카페처럼, 평일과 다른 특별한 아침을 의미했습니다.

 

오뚜기는 이 이름 하나로 한국 베이킹 믹스 시장의 기본값을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까지, 한국에서 베이킹 믹스는 여전히 '팬케이크 가루' 혹은 '핫케이크 가루'라고 불립니다. 제품명이 카테고리명이 됐습니다.

 

1971년 오뚜기 핫케이크 가루 → 한국 베이킹 믹스 = "핫케이크 가루"로 카테고리 고착

 

이것은 브랜딩의 관점에서 대단한 성취입니다. 호치키스가 스테이플러가 되고, 스카치테이프가 테이프가 됐듯, 오뚜기 핫케이크 가루는 한국 베이킹 믹스 시장의 고유명사가 됐습니다.


3장 — 과학이 만들어낸 만능성: 베이킹파우더와 글루텐의 비율

팬케이크 가루가 팬케이크 이외의 음식에도 응용이 쉬운 이유는 마케팅이 아니라 식품 과학에 있습니다.

만능 가루의 비밀, 식품 과학의 설계

팬케이크 믹스의 기본 구성은 밀가루, 베이킹파우더, 설탕, 소금, 그리고 버터 분말입니다. 이 중 핵심은 밀가루의 단백질 함량(글루텐)과 베이킹파우더의 비율입니다.

 

밀가루에는 단백질 함량에 따라 종류가 나뉩니다. 강력분(빵용, 단백질 12~14%)은 글루텐이 많아 쫄깃한 빵 구조를 만들고, 박력분(케이크용, 단백질 7~9%)은 글루텐이 적어 부드럽고 섬세한 결을 만듭니다. 팬케이크 믹스는 그 중간인 **중력분(다목적 밀가루, 단백질 10~12%)**을 기반으로 합니다.

 

글루텐 함량: 강력분(12-14%) > 중력분(10-12%) > 박력분(7-9%)

 

중력분 기반에 베이킹파우더가 적절히 배합되면, 이 혼합물은 응용 범위가 넓어집니다. 물을 조금 더 넣으면 크레이프처럼 얇아지고, 물을 줄이면 와플처럼 두터워집니다. 설탕과 달걀을 더 넣으면 케이크에 가까워지고, 팥을 채워 틀에 넣으면 붕어빵에 가까운 결과물이 됩니다. 다만 붕어빵이나 호떡처럼 발효나 속재료가 개입하는 음식은 반죽의 되기나 배합을 추가로 조정해야 합니다. 반죽의 수분비와 첨가 재료에 따라 최종 결과물이 달라지되, 기본 구조는 공유합니다.

 

베이킹파우더는 열과 반응해 이산화탄소를 만듭니다. 이 기포가 반죽을 부풀립니다. 팬케이크의 폭신함, 와플의 바삭함, 붕어빵의 겉 식감 — 모두 이 원리가 작동한 결과입니다. 베이킹파우더의 양과 반응 타이밍을 잘 설계하면, 하나의 가루가 프라이팬에서도, 와플 메이커에서도, 붕어빵 틀에서도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합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팬케이크 가루의 응용성은 우연이 아닙니다. 중간 글루텐 + 화학 팽창제의 조합이 비교적 넓은 범위의 제빵에 적용 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그 응용성의 토대를 만들었고, 마케팅이 그 가능성을 이름에 담았습니다.


4장 — "하나로 다 되는" 한국 소비 문화

그런데 과학적 범용성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지혜, 하나로 다 되는 주방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팬케이크 믹스는 팔립니다. 그러나 한국만큼 팬케이크 가루 하나로 이렇게 다양한 음식을 만드는 문화는 흔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비스퀵은 비스킷과 팬케이크 위주로 사용되고, 일본의 모리나가(森永) 핫케이크 믹스는 핫케이크와 일부 케이크 레시피에 주로 쓰입니다. 한국처럼 붕어빵, 계란빵, 호떡 반죽, 도넛까지 응용이 확장되는 경우는 독보적입니다.

 

여기에는 한국 가정의 "하나로 다 되는 제품" 선호 문화가 작동합니다.

 

한국 가정의 주방 공간은 상대적으로 좁습니다. 다양한 특화 재료를 보관할 여유가 적습니다. 그래서 한 제품이 여러 용도를 커버할 때 소비자 가치가 높아집니다. 비슷한 현상이 다른 카테고리에서도 반복됩니다. 부침가루는 전, 튀김, 만두피에 두루 쓰이고, 튀김가루는 치킨, 오징어 튀김, 채소전에 다 쓰입니다. 단일 제품의 다용도 활용은 한국 식품 소비의 중요한 패턴입니다.

 

오뚜기는 이 패턴을 일찍 읽었습니다. 제품 뒷면 레시피에서 와플, 계란빵 만드는 법을 명시한 것은 소비자 교육이자 용도 확장 마케팅이었습니다. 이미 설탕·베이킹파우더·소금이 배합되어 있어 소비자가 별도로 재료를 계량할 부담이 줄어든다는 점도, 레시피가 재료보다 먼저 브랜드를 확장시키는 데 한몫했습니다. 레시피를 공식화함으로써, '팬케이크 가루로 이것도 된다'는 생각을 '팬케이크 가루로 이것도 당연히 된다'로 전환시켰습니다. 허용의 언어에서 기본값의 언어로.


5장 — 붕어빵이라는 결정적 증거

팬케이크 가루의 한국식 만능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붕어빵입니다.

길거리에서 식탁으로, 붕어빵의 변신

붕어빵은 일본의 다이야키(たい焼き, 도미빵) 계열에서 유래한 것으로 설명되는 길거리 음식입니다. 전통적인 다이야키 반죽은 박력분, 달걀, 설탕, 우유, 베이킹파우더를 따로 배합합니다. 한국에서도 붕어빵 노점상들은 직접 반죽을 만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한국 가정에서는 팬케이크 믹스를 활용한 붕어빵 응용 레시피가 널리 퍼졌습니다. "팬케이크 가루에 달걀 하나, 우유 조금 넣으면 됩니다." 이 레시피가 블로그, 유튜브, SNS를 통해 수많이 공유됐습니다. 다만 노점 붕어빵과 완전히 같은 식감을 내려면, 가정에서는 반죽의 되기를 조금 더 되직하게 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붕어빵 반죽을 위해 박력분, 베이킹파우더, 설탕, 소금을 따로 계량할 필요는 크게 줄었습니다. 팬케이크 가루 봉지 하나가 그 대부분을 대체합니다.

 

이것은 팬케이크 가루가 단순한 조리 편의 재료가 아니라, 전통 길거리 음식의 가정 내 재현을 돕는 플랫폼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참고로 한국의 호떡 역시 19세기 후반 중국계 이주민의 유입과 함께 들어온 것으로 설명되는데, 오늘날 길거리 음식으로서의 호떡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은 훨씬 후대의 일입니다. 이런 음식들이 팬케이크 가루를 매개로 가정에서 재현되는 흐름은, 노점 문화가 가정 문화로 옮겨오는 하나의 경로를 보여줍니다.


6장 — 비스퀵과의 비교: 같은 구조, 다른 문화

미국의 비스퀵은 1931년 출시됐습니다. 오뚜기 핫케이크 가루보다 40년 앞섰습니다. 그리고 비스퀵도 초창기에는 '만능 가루'로 마케팅됐습니다. 출시 초기 광고 문구는 이랬습니다. "비스킷, 팬케이크, 수제비, 와플, 그 외 다양한 음식을 한 번의 믹싱으로."

이름과 쓰임의 진화, 플랫폼 전략의 완성

그런데 비스퀵이 수십 년이 지나면서 어떻게 됐는지 보면, 미국 문화와 한국 문화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미국에서는 베이킹이 전문화됐습니다. 케이크용 믹스, 머핀용 믹스, 브라우니 믹스, 팬케이크용 믹스가 각각 따로 개발되고 팔렸습니다. 만능 가루보다 특화 가루가 더 많이 팔리는 시장이 됐습니다. 비스퀵은 여전히 팔리지만, 그것은 '만능'의 아이콘이 아니라 '클래식 비스킷용'의 아이콘이 됐습니다.

 

한국은 반대 방향으로 갔습니다. 특화 가루가 각자의 자리를 잡는 동시에, 팬케이크 가루의 만능화가 더욱 강화됐습니다. 핫케이크 믹스는 오뚜기 프리믹스류 포트폴리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국: 만능 → 특화 분화 vs 한국: 만능 → 만능의 심화

 

같은 구조의 제품이 두 나라에서 전혀 다른 진화 경로를 걸었습니다.


7장 — "배신"의 브랜드 전략: 이름을 넘어선 쓰임이 브랜드를 키운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왜 팬케이크 가루는 팬케이크만 만들지 않을까요.

 

브랜드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배신이 아니라 확장입니다. 팬케이크 가루가 붕어빵에도, 와플에도, 계란빵에도 쓰인다는 사실은 이 제품의 가치를 높입니다. 소비자가 팬케이크 가루 한 봉지를 살 때, 그 결정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팬케이크를 만들 것'이 아니라 '다음에 붕어빵도 만들 수 있고, 와플도 만들 수 있다'는 잠재적 가능성을 사는 것입니다.

 

마케팅 학자들은 이것을 "플랫폼 제품(Platform Product)" 전략이라고 부릅니다. 제품 자체가 다양한 용도의 기반이 될 때, 소비자는 그 제품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스마트폰이 전화기이자 카메라이자 지도이자 지갑인 것처럼, 팬케이크 가루는 팬케이크이자 와플이자 붕어빵이자 계란빵입니다.

 

오뚜기가 이 전략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설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반세기 넘게 이 제품이 한국 베이킹 믹스 시장의 기본값으로 자리잡은 것은, '팬케이크 이상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응용성이 브랜드를 지속시킨 핵심 동력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름은 팬케이크입니다. 그러나 팬케이크를 넘어섰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마무리 — 노란 봉지가 담고 있는 것

편의점 제과·제빵 코너의 노란 봉지를 다시 집어듭니다.

 

1930년 미국 기차 식당칸의 요리사가 만들어놓은 혼합물. 1931년 비스퀵이 산업화한 개념. 1971년 오뚜기가 한국에 이식하며 '핫케이크 가루'라 이름 붙인 제품. 그 이름 아래 팬케이크, 와플, 붕어빵, 계란빵, 호떡, 스콘이 모두 담겼습니다.

 

이름은 팬케이크지만, 쓰임은 그 이름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확장이 반세기가 넘는 생존을 만들었습니다.

 

Nomen est omen. — 이름은 징조다.

 

로마의 격언입니다. 그러나 팬케이크 가루는 이 격언을 거꾸로 증명했습니다. 이름이 징조가 아니라, 쓰임이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팬케이크 가루는 팬케이크를 넘어서야 팬케이크 가루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팬케이크 가루'는 이제 팬케이크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집에서 구울 수 있는 모든 것의 시작점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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